얼마 전 갑자기 휴대폰이 고장나 한동안 고생한 일이 있다. 수리를 맡긴 사흘간 모든 연락이 두절된 상태로 지내야 했다. 이틀간은 생활이 완전히 마비된 상태로 지냈다. 조별과제 모임도, 친구와의 약속도, 고장난 휴대폰 때문에 나가지 못했다. 이메일을 보내놓고는 약속 시간 전에 상대방이 확인해주기를 기다리며 전전긍긍했다. 그런데 휴대폰이 고장난지 사흘째에 접어들면서는 마비되어 버렸다고 생각했던 생활이 편안해지기 시작 했다. 조별과제 모임을 공지하는 메시지도 날아올 일이 없었고, ‘밥먹자’, ‘뭐하냐’ 따위의 실없는 메시지에 답장 할 필요도 없었다. 나흘째, 수리된 휴대폰을 받아들고는 악몽이 시작됐다. 전원을 켜자마자 지난 사흘간 받지 못했던 연락의 알림과 메시지들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처리해야 할 일, 누군가의 부탁, 안부를 묻는 메시지, 조별과제모임 등 해야 할 일들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모두 발신자를 알 수 없는 기록들. 휴대폰에 저장되어있던 백수십개의 연락처가 모두 소실된 것이었다. 소중한 연락처를 모두 잃어버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갑자기 고장나 버린 휴대폰을 원망했다. 하지만 연락처를 잃어버린 데는 내 탓이 크다. 왜 진작 가족, 친지, 친구들의 전화번호조차 외워두지 않고, 소중한 연락처들을 수첩에 적어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휴대폰이 있기 전이라면 당연히 외워두고 적어두었어야 할 것을 말이다. 전화번호들을 휴대폰에 저장 해 두는 것이 편리하고 관리하기 쉬운 만큼 만큼 전화번호를 잃어버리기도 쉽다. 그리고 인간은 소중한 사람의 연락처마저 기계가 대신 기억해 주지 않으면 외우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기술의 도움은 사람을 점차 아둔하게 만든다.
닐 포스트먼은 기술이 신격화되고 모든 권리를 독점하는 문화적 상황을 테크노폴리라고 명명했다. 테크노폴리에서 기술은 인간의 종교적, 문화적 전통 가치를 허물고 이것들의 의미를 새롭게 규정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테크노폴리는 우리의 삶을 정보에 접근 하려는 노력으로 채울 것을 요구한다. 왜 정보를 추구해야 하고 이에는 어떤 문제가 따르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는다. 정보를 추구하는데 있어 ‘왜’ 에 대한 고민으로 지체할 시간은 없다. 오늘날 과학의 권위는 중세시대 종교의 권위와도 같다. 하지만 이러한 과학 만능주의의 세계에서 정보의 홍수는 인간에게 ‘왜’에 대한 답변을 주지 못한다. 그리고 인간은 이미 ‘왜’를 물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우리는 ‘왜’를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아주 사소한 고민일지라도 골치를 썩이며 스스로 해결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저 검색어를 떠올리고 인터넷 페이지의 검색창에 입력하는 과정만 거침으로써 우리는 고민에 대한 답변을 쉽게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이 고민의 종류마저 기술이 결정 해 준다. 검색어의 첫 글자만 입력하면 검색창은 그 글자로 시작되는 검색어들 중 가장 많이 검색된 검색어를 띄워준다. 인간이 할 일은 고민할 필요 없이 방향키를 움직여 검색어를 선택하는 일 뿐이다. 무엇을 가장 많이 검색했는지를 보여주지만 왜 검색했는지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별 의구심 없이 가장 많이 검색한 검색어를 선택한다.
오늘날 우리는 이렇듯 제시 되는 것들에 대한 선택에 있어 ‘왜’를 묻지 않는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물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며,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기술이 ‘왜’를 물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도록 해 주는 것이다. 사실 기술은 이 ‘왜’에 대한 답을 주지도 못한다.
워쇼스키 형제 감독의 영화 매트릭스는 기계에 의해 지배당하는 인간 사회라는 디스토피아를 그려냈다. 영화 속에서 기계에 지배당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매트릭스라는 프로그램 안에서 별 문제 없이 평화롭게 살아간다. 자신들이 기계의 에너지원이 되어 육체는 캡슐에, 정신은 매트릭스라는 프로그램에 구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간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 사이에 ‘왜’를 묻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 시스템은 이들에게 ‘왜’를 제시해 주지 않는다. 다만 제거하려 할 뿐이다. 시스템의 거부자은 기계의 지배에 대항해 사람들을 일깨우기 위한 전쟁을 치른다. 하지만 전쟁의 끝이라고 생각한 곳에서 그마저도 시스템의 계획된 방정식에 의해 작동하는 프로그램의 일부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기계들은 인간의 불완전성마저 시스템에 반영했고, 덕분에 ‘왜’를 일깨우기 위한 전쟁은 여섯 번이나 반복되어 왔던 것이다. 영화는 인간이 결국 주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시스템의 지배 아래 놓인 존재임을 보여준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현실과 격리된 매트릭스의 세계는 아닐지라도, ‘기술’이라는 시스템의 지배 아래에 놓여있다는 점에서 매트릭스와 매우 비슷하다. 시스템의 거부자들은 시스템의 면역체계에 의해서 끊임없이 제거되고 교화된다. 기술은 ‘왜’를 물어야 할 필요에 대해 대답해 주기 보다는 눈을 가리는 길을 택했다. 눈을 가린 채 편리하고 아늑한 세계를 제시하면 대다수의 사람은 ‘왜’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시스템을 따른다. 이 세계는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의문부터 종교적, 문화적인 가치와 전통의 도덕률에 대한 질문들을 모두 골치 아파해 가며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이런 가치들은 이제 기술보다 아래의 것으로 역전되고 말았다.
대선 정국이 한창이다. 나라가 어렵다고 한다. 모든 대선 후보들이 경제를 살리겠다는 기치 아래 자신에게 투표해 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이중 지지율 1위를 달리는 후보는, 끊임없이 제기되는 의혹과 도덕성 시비에도 불구하고 지지율 1이 자리를 굳건히 지켜오고 있다. 경제를 살릴 능력, 기술이 있는 대통령감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로 우리나라의 경제가 그토록 어려운 것일까. 지난 정권은 5년간 실정을 일삼아 모든 대선후보가 경제를 살리겠다는 공약을 내세워야만 하는 것일까. 의아하게도 객관적 지표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고 있다. 실질적 국민 소득은 2만달러에 육박하게 되었고, 700선이던 종합주가지수는 두배 이상 성장했다. 양극화가 심각해졌다지만 소득 분배율은 이전의 정부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가 어렵고, 경제를 살려야 하는 까닭은, 누군가 그렇다고 하기 때문이다. 시스템이 끊임없이 그렇다고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할 능력을 박탈당했다. 스스로 그 박탈을 인식할 틈조차 없을 만큼, 우리는 정보의 홍수, 미디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매체는 끊임없이 메시지를 생산해내고 노출시킨다. 이제 우리의 생활은 매체로부터 도망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메시지의 질과 이유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메시지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노출의 반복은 사고에 파고들어 그것이 스스로의 생각인양 여기도록 하며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설령 그 내용이 비도덕적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선택하는 기준의 관계들이 역전되어 버릴 만큼, 나라가 어렵고,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시스템의 메시지는 절대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도덕성을 따지는 것은 고리타분하고 실리에 밝지 못한 일이 되어버렸다. 무엇보다 능력과 기술이 최우선의 덕목이 된 사회. 그 능력조차 누군가에 의해 포장된 것일 가능성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큰 문제가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능력만이 최고의 가치다. 그 능력으로 무엇을 하는지, 왜 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물을 필요가 없는 것으로 취급되어 버린 채 지지율은 떨어질 줄을 모른다.
‘지지율’ 이라는 여론조사 결과는 ‘객관성’을 무기로 수없이 제기되는 의문을 쓸데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매트릭스에서 시스템은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한 자를 낙오자로 낙인 찍는다. 이는 시스템의 관리 프로그램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 뿐 아니라, 시스템에 적응한 자들에 의해서도 이루어진다. 오늘날의 여론 조사 결과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은데 무엇을 고민하느냐’ 하는 이야기를 하기 위한 것이 여론조사의 목적이다. 하지만 여론조사의 실상을 알아보면 그 결과가 다수의 의견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모든 사람이 경제활동에 전념하고 있을 시간에 유선전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조사는 결국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 내기 위한 명목상의 조사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조사 결과의 객관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 없다. 낙오자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주변으로부터 고리타분한 괴짜 소리를 듣고 싶지 않으면 대세를 따라야 한다. 양심의 가책을 느낄 일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옳다고, 나라가 어렵고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누군가가 그렇게 끊임없이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은 이렇듯, 사람들에게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기술의 지배를 받아들일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다. 청년실업이 문제라고 한다. 많은 대학생들이 취업을 위해 능력을 쌓는 일에 청춘을 투자한다. 학점을 쌓고 자격증을 따고 높은 점수를 기록하는 것, 기술을 쌓는것이 대학생의 본분인 시대가 되었다. 이 기술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왜’가 상실된 시대가 되었다. 학점을 쌓고 자격증을 따는 등의 일에 ‘왜’를 묻는다면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서’ 정도의 답변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한 ‘왜’를 묻는다면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정도의 답변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왜 돈을 벌어야 하는지, 그렇게 번 돈으로 무엇을 할 것이며, 그 무엇은 또 왜 하고자 하는 것인지를 묻는다면, 거리낌 없이 대답할 수 있는 젊은이가 몇 명이나 될까.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학교에서도 ‘왜’를 고민하는일 따위는 낙오자의 일이 되어버렸다. 우리에게는 ‘왜’를 고민할 시간이 없다. 좀더 높은 점수를 따고, 좋은 학교를 가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한 경쟁 시대에 ‘왜’를 고민할 여유는 없다. 고등학교에서도, 대학에서도 ‘왜’를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 단지 기술을 가르쳐 줄 뿐이다. 점수를 더 받기 위한 기술, 영어를 더욱 잘 하기 위한 기술, 면접을 잘 보기 위한 기술 따위를 배우면서 왜 배우는지, 그것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우선은 제쳐두고 나중에 때가 되면 고민 할 것’ 정도로 치부되어 버린다. 하지만 그런 ‘때’가 우리에게 주어지기는 하는 것일까.
영화 매트릭스에서 시스템의 거부자로, 시스템과 전쟁을 벌이는 진영의 사이퍼 라는 인물은 거부자들을 배신하고 시스템으로 돌아갈 것을 선택하며 이런 말을 한다. ‘이게 진짜가 아니란 걸 알아요, 입에 넣으면 매트릭스가 맛있다는 신호를 보내주죠’ 그의 앞에는 스테이크가 놓여 있다. 우리 앞에는 어떤 스테이크가 놓여 있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 모두가 그 스테이크는 허상이고 내가 느끼는 맛은 신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테이크를 먹길 원하고, 결국 선택하게 되는 것은 ‘왜’를 고민하는 것 보다는 기술이라는 스테이크를 선택하는 쪽이 쉽고 편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선택에 대해 개인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개인들은 희생양일 뿐이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고민하는 소수에 대한 배려는 없다. 고민하고 싶어도 고민할 수 없는 사회가 되어버렸고, ‘왜’를 찾는 일은 경쟁에서 뒤처지기 위한 일이 되어버렸다. 닐 포스트먼은 이러한 개인들에게 사랑으로 무장한 저항 투사가 될 것을 이야기한다. ‘왜’를 고민하라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다수의 사람으로부터 고리타분한 것으로 취급당하고, 고민하는 자를 낙오자로 만들어 버릴지라도 그것이 허상인 것을 안다면 의미는 역전시킬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낙오자는 기술의 지배에 순응하는 다수의 시스템 수용자인 것이어야 옳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왜’를 고민하기 위한 일들에도 기술은 사용된다. 오늘날 많은 블로그들은 자신의 관점,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며 기술이 만들어준 현대의 사상의 시장에 자신들의 사상을 던져두고 다른 사상과의 경쟁을 통해 좀 더 많은 ‘왜’를 고민한다. 닐 포스트먼이 말한 ‘기술적 겸양’를 갖춘 사람이라면 ‘왜’를 고민하는 일에 기술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기술들과 달리 세상을 지배해도 좋을법한 한 가지 기술이 있다면, ‘왜’를 찾고 고민하는 기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왜'를 고민하는 방법에 있어 글의 논점이 약간 샜다가 다시 원점으로 흐른 감이 있는 것 같다. '왜'를 고민하지 않게 하는 대상이 정보화시대 새로운 패러다임에 우리를 속박하는 기술인지, 개인의 주관적 판단을 흐리는 매스미디어의 독점성인지, 소수의 개인을 고려하지 않는 단체주의적 군중심리인지 모호해져 버렸다. 결국 그 모두의 공통점을 찾아,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그 무엇'이 부르는 본질적인 문제. '왜'에 대한 고민은 많이 공감 되네.
다만, 우리 사회가 '왜'를 고민하는 것을 잊어가는 상황을, 글의 서두에서처럼 기술이 가져다준 억압으로만 볼 수는 없지 싶다. 글의 마지막에서처럼, 우리는 어쨌거나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숨쉬며 끝까지 '왜'를 고민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니까. 앨빈 토플러의 저서에서 나온 말처럼, 새로운 시대 새로운 패러다임은 우리에게 공허하고 피동적인 편리와 안락만을 준 게 아니라 또 다른 고민을 할 시간적 여유를 준 것은 아닐까. 기술이 가져다 준 쓸데없는 '왜' 에 대한 고민 대신 좀 더 진지하고 쓸모 있으며 깊이 있는 고민을 할 수 있는 그런, 여유.
결국 이 사회의 변화가 인간에게 남겨지워준 숙제가 그것이라면, 우리는 편리와 육체적 안락의 수동태로만 남겨지지 않는 것으로 그 숙제를 완수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쨌거나 그 '왜'라는 고민 역시 인간이 만들어낸 인간의 일일테니.
아쉬운 점은. 패러다임 전환기, 사회변혁기의 대다수가 그러하듯이. 그 모두는 그 홍수처럼 넘치는 여유와 기회에도 불구하고 조금 더 관심을 갖고 조금 더 깊이 고민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 청년실업을 고민하고, 경제 파탄의 책임을 고구하고, 자기계발의 방향성을 고구하는데에. 누군가에게 그 책임을 떠넘기고, 적당히 매스미디어가 떠들어대는 인간을 지지하고, 맹목적인 물질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그친다는 것.
아쉬운 일이지만, 누구를 탓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을 이 상황을 어찌해야할까. 너는 사회학도로서, 어찌 보느냐. 나는 다만 '우리만은 그러지 말자' 라고 할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