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하나의 작품은 각자의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애썼다. 갤러리 꿈에서 만난 여덟 개의 영상물은 각기 다른 이야기를 다른 수단으로 전달하고 있었다. 심장이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버린 채 혈관들은 갈 곳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는듯한 여성의 모습이 차례 차례 복제되어가는 영상에서 복제가 가지는 가치의 상실을 느꼈다. 아우라는 애초에 복제를 거치며 상실되지만, 그 ‘복제’ 자체가 낳는 가치는 새로운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복제는 그러한 가치마저 상실해 버릴 만큼 무분별하고 몰가치적이지 않나 생각 해 보았다. 미니홈피와 블로그의 ‘스크랩’또는 ‘펌’기능 같은것 들이 결국 심장은 상실된 채 혈관만 거미줄처럼 뻗친 인간을 만들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날의 인간관계는 이미 그런 거미줄을 닮아가고 있기도 하다.
한 인형이 자신의 피부인 헝겊을 찢어 다른 표정 없는 인형의 표정을 만들어주고, 다른 무표정의 인형이 나타나 그 표정을 빼앗아버리는 영상을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표정이 없는 인형에게 자신의 피부를 찢어가며 표정을 만들어주는 일은 과연 표정 없는 인형에게 고마운 일일까? 아니,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내 스스로 내 표정을 갖는 일은 다른 누군가가 해주지 못할 일이다. 다른 누군가가 내 표정을 만들어주는 일은 그것을 빼앗아 가는 것 만큼 잔인하고 폭력적인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 강요 당하고 있다. 마치 인형이 자신의 피부를 찢어 다른 인형의 표정을 만들어 준 것 같이, 고마워해야 할 일인 것 같지만, 그것마저도 강요이고 폭력이다. 우리는 무슨 표정을 하고 살아가야 하는지 결정하지 못한다. 그리고 어느새 부여받은 그 표정마저 빼앗기기도 한다.
고양이가 사람이 되고, 사람이 다시 고양이가 되어가는 애니메이션을 보면서는 요즘의 고양이 같은 사람들을 생각 해 볼 수 있었다. 고양이는 도도하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동물, 적어도 마음을 줄 수 있는 대상을 만나기 전 까지는 그럴 것 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고양이의 모습은 요즘 사람들과 유난히 닮아있다. 비록 사람들 속에 살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 혼자인 채로 마음 줄 곳을 찾지 못하고 있거나, 마음 줄 곳을 찾지 못해 혼자인 채로 있는 사람들 속에 가끔은 나도 끼어있는 건 아닐까 생각 해 보기도 한다. 스크린 속의 고양이는, 더러는 사람으로 변하기도 했던 그 고양이는, 계속 어디론가 도망 다녔다. 도망 다닐 필요는 없다. 그리고 그 누구도 도망치라고 하지는 않았다.
더러는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데다 지루하도록 길고 반복적인 영상으로 이루어진 작품도 있었고, 이야기 하고자 하는 바가 고작 그건가 싶은 메시지를 담은 작품도 있었으며, 그 표현 수단이 너무나 일반적인 것이어서 뉴미디어 페스티벌에 걸맞는 것인가 싶은 작품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작품들은 그런 여백에 나로 하여금 나의 생각을 채울 수 있는 기회와 시간과 공간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해준 건 아니었을까. 적어도 교실과 강의실에서 배울 때 보다는 많은 ‘나만의’ 생각을 했다. 형태는 다르지만 일종의 플랫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형태가 어찌되었든 예술은, 그런 플랫폼이 되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플랫폼은 사전적으로 기차를 타고 내리는 장소를 의미한다. 오늘날에는 일종의 틀로 인식되기도 한다. 기차가 들어오기 전 까지 플랫폼이 빈 틀의 형태를 하고 있어서일까. ‘틀’이라는 의미로서의 플랫폼은 어디 IT관련 글들에서 많이 보고 익힌 것 같다. 프로그램은 구성과 내용을 모두 담고 있다. 잘 만들어진 프로그램은 사용하는 이에게 편의를 제공하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짜여진 한도 내에서다. 하지만 플랫폼은 구성만 짜여져 있는 것으로 그 내용은 사용하는 이가 채워야 할 것으로 텅 비워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잘 만들어진 플랫폼은 사용하는 이가 채우고자 하는 내용을 의도 하는 대로 채울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고, 그로 하여금 내용의 질을 높이는데도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위에 적은 감상들로 만난 작품들은 내게 새로운 형태의 플랫폼을 제시 해 주지는 못한, 프로그램에 가까운 작품들이었다. 다만 기존의 것들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프로그램에서 플랫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술에 다가서는 사람의 자세라면, 예술을 프로그램보다는 플랫폼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한결 낫지 않을까. 공부의 근본이 없는 탓 인지, 나는 폭넓은 사전지식과 깊은 이해로 예술작품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다만 내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뿐이다. 이런 내게 예술을 플랫폼으로 이해하는 일은 자기합리화이자 나름의 철학 같은 것이다.
그런데 매우 반갑게도, 그런 플랫폼을 찾았다. 그런 플랫폼의 시연을 통해 만들어진 작품들을 만난 것이다. 마치 공연과도 같았다. 꼭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악기를 연주해야만 공연인 것이 아니라는 기대가 충족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처음엔 단순한 모션그래픽인줄 알았다. 무슨 의미인지 모를 선들이 뻗어져 나가기를 반복하기도 했고, 단순한 패턴이 교차되기도 했다. 다만 뮤직비디오처럼 박자가 맞고 리듬감이 있었다. 하지만 단순하고 반복적인 이미지들이 그리 특별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설명을 듣기 전 까지는 그랬다. “작가분이 프로세싱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시연하는걸 캡쳐한 영상이에요” 라는 한마디가 순식간에 많은 것을 명쾌하게 정리되도록 해주었다. 안내해주신 분, 정말 감사하다.
작가는 프로그래밍을 통해 자신이 구현하고자 하는 내용을 위한 사전 구성을 한다. 이는 곧 플랫폼을 코딩 하는 사전작업의 과정이다. 작품이 만들어지는 것은 다음 과정에서이다. 플랫폼이 마련되면 작가는 그 플랫폼을 이용해 내용을 구성해나간다. 내가 본 작품과 같이 음악을 들으며 그 음악이 주는 영감을 표현하는 것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어떤 음악을 듣는가 뿐 아니라, 같은 음악을 들을지라도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느낌을 가지며 표현하는가에 따라 같은 플랫폼 안에서 다른 작품이 내용을 형성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같은 플랫폼을 누가 사용하는가에 따라서도 내용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따지면 그 플랫폼이라는 것이 결국 지금에도 얼마든지 존재하는 ‘도구’임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언어든 빛이든 붓이든 악기든, 결국 누가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다른 의미를 만들어 내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뉴미디어 안에서 안에서는 이 플랫폼마저 재창조되기 때문에, 그리고 그러한 과정이 누구에게나 열려있기 때문에 매력적인 것이다. 게다가 쉽기까지 하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프로세싱(Processing)이라는 프로그램은 MIT 미디어랩에서 만들어낸 프로그램이다. 무려 무료 공개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래밍 언어인 Java 언어를 기반으로 작동한다는데, 자세한 건 나도 아직 알지 못한다. 하지만 확실한 건, 프로세싱의 조작이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거나, 새로운 악기를 만들어 내는 일 보다는 훨씬 쉽고 빠르기에 누구에게나 가능할 것이라는 점이다.
작가들은 이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자기만의 플랫폼을 구성할 수 있다. 준비된 플랫폼은 그 내용을 채우는 일을 공연과도 같이 실시간으로 해낼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뉴미디어 테크널러지가 접목된 드로잉 쇼라고 해야 할까. 같은 플랫폼을 사용하면서도 그때 그때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따라 각기 다른 내용을 가진 다른 작품들이 탄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생명력을 가진다. 그리고 그 생명력은 작가와 작품 안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니다. 이 생명력은 작품을 보는 이 에게도 전달되고 심지어는 보는 이의 위치를 바꿔놓기까지 한다. 덕분에 갤러리 킹에서, 나는 작품의 주체가 될 수 있었다.
카메라는 디스플레이를 바라보는, ‘보는 이’를 앵글에 담는다. 보는 이는 곧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디스플레이의 영상에 비춰진다. 마치 거울과도 같다. 가전제품을 파는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여기서의 거울은 단순한 거울이 아니다. 작가가 마련 해 놓은 플랫폼은 우리가 흔히 접해온 볼록거울, 오목거울보다 확장된 차원의 거울이다.
거울 안에서 나의 이미지는 중첩되어 나타나거나 지연과 반복을 거듭하며 나타나 새로운 형태로 재창조된다. 거울 속의 ‘나’ 들이 방향을 틀어 서로를 바라본다. 걸음을 좌우로 조금씩 움직이면 서로를 바라보는 두 개의 내가 하나로 합쳐지고 다시 둘로 갈라지기를 반복한다. 앞으로 다가서면 커지는 나는 눈이 하나 달린 괴물이 되기도 한다. 다리를 하나를 가질 것인가 네 개를 가질 것인가도 선택할 수 있다. 다른 거울에서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뒤섞여 나타난다. 불과 몇 초 전의 나이지만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생소하다. 하지만 곧,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를 서로 만나게 해주는 방법을 알게 되고 몸을 움직여 셋을 소개시킨다. 하나의 화면 속에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세 사람의 나를 보며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했다.
위의 감상은 내가 만든 작품에 대한 감상이라고 해야 옳다. 작가는 단지 영상 테크널러지를 이용한 거울이라는 플랫폼을 마련 해 주었을 뿐이었다. 그 거울을 요술거울로 받아들일 것인지, 기괴한 거울로 받아들일 것인 지는 보는 사람의 선택이다. 그리고 그 거울을 통해 새로운 나의 이미지들을 만들어 낼 것인가 역시 선택의 문제에 달려있다. 나는 새로운 나의 이미지를 만들어보았지만, 다른 누군가는 분명 다른 작품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멋지다.
최근까지의 미디어는 인간을 주체 보다는 대상으로 여기고 메시지를 만들어왔다. 하지만 오늘날의 미디어는 인간을 주체로 인정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사용자에 의한 컨텐츠(UCC)의 양이 늘어남과 더불어 그 질도 날로 높아지는 것 역시 미디어가 가지는 편의성에 의해 가능해진 것이다. 이러한 미디어는 다만 플랫폼을 제공 해 주었을 뿐이다. 내용을 만들어가는 주체의 영역이 구태여 ‘작가’라는 이름을 달고자 하지 않는 우리 주변의 ‘우리’에게까지 확장 되었다. 창작의 영역, 예술의 영역이 확장된 것이다. 누군가는 달가워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인정하지 않거나.
이번 전시를 통해 알게 된 프로세싱이라는 프로그램은 작가가 원하는 플랫폼을 좀더 수월하게 만들 수 있도록 돕는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아직 내가 만들고자 하는 플랫폼과 그 플랫폼을 이용해 만들어 내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고민의 과정을 도울 또 하나의 플랫폼이 만들어졌다는데 있어 이번 전시에의 “참여”는 기억에 남는 경험이 될 것이다.




서율은 어디랍니까 ㅋㅋ
그런데 없다